던전 100번 돌았을 때의 공포
- 03 Dec, 2025
던전 100번 돌았을 때의 공포
1회차: 오 신선하네
월요일 오전 10시 30분. 새 빌드 받았다.
“이번 업데이트 던전 추가됐어요.”
기획자가 슬랙에 올렸다. 기대된다. 신규 콘텐츠다.
접속했다. 로딩 화면부터 새롭다. BGM 바뀌었네. 던전 입장.
“오 이펙트 예쁜데?”
첫 몹 잡았다. 타격감 좋다. 보스까지 5분. 클리어.
보상 확인. 전설 무기 나왔다. 확률 체크 시작.
“재밌네 이거.”
테스트 노트에 적었다. ‘던전 난이도 적절, 보상 괜찮음, 이펙트 만족’.
1회차는 언제나 즐겁다.

10회차: 패턴 파악
같은 날 오후 3시.
던전 10번 돌았다. 패턴이 보이기 시작한다.
몹 배치 똑같다. 보스 패턴 3개. 회피 타이밍 외웠다.
“전설템 확률 3/10… 30%네.”
엑셀에 정리한다. 회차, 시간, 획득 아이템, 버그 발견 여부.
아직 괜찮다. 일하는 기분이다.
보스 페이즈 2에서 스킬 씹히는 버그 찾았다. 만티스에 올렸다.
“재현율 40% 정도 되는 거 같은데…”
몇 번 더 돌아야 한다. 버그 재현이 중요하다.
QA의 기본이다.
30회차: 자동화 모드
화요일 오전.
어제 20회 더 돌았다. 오늘 또 10회.
이제 눈 감고도 플레이 가능하다.
입장 - 1번 몹 처리 - 2번 몹 처리 - 보스방 - 패턴 1, 2, 3 - 클리어.
4분 50초. 시간까지 똑같다.
점심 먹으면서도 돌렸다. 김밥 씹으면서 보스 잡는다.
“아 죽었네.”
집중 안 하면 죽는다. 그래도 자동으로 손이 움직인다.
확률 데이터 쌓인다. 전설템 28%. 예상 범위 내.
밸런스팀 과장님이 물었다.
“겜큐님, 난이도 어때요?”
“적당한 것 같아요.”
적당한지 모르겠다. 이미 너무 익숙해서.

50회차: 이펙트가 안 보임
수요일 오후 2시.
50회 돌았다. 이펙트가 안 보인다.
처음엔 예뻤던 스킬 연출. 이제 그냥 화면 번쩍임.
보스 등장 컷신 스킵한다. ESC 누르는 손가락이 자동이다.
BGM도 안 들린다. 유튜브 틀어놨다.
“또 노란색이네.”
전설템 색깔. 보라색 먼저 확인한다. 신화템 0개.
확률 0%. 너무 낮은 거 아닌가.
기획자한테 슬랙 보냈다.
“신화템 확률 확인 부탁드려요. 50회 0드랍이에요.”
답장 왔다. “0.5% 맞아요.”
계산해봤다. 50회에서 안 나올 확률 77%. 정상이다.
더 돌아야 한다.
숨 쉬듯이 던전 돈다. 생각 없이 클릭한다.
이게 일이다.
70회차: 게임이 아니다
목요일 오전.
70회 넘었다. 이건 게임이 아니다.
엑셀 작업이다. 데이터 입력이다.
회차, 클리어 시간, 드랍템, 골드량, 경험치.
숫자만 본다. 게임 화면은 배경이다.
옆자리 신입이 물었다.
“선배님, 재밌어요 그 던전?”
“응.”
재미? 모르겠다. 재미를 느낄 정신이 없다.
점심시간. 구내식당 간다.
“오늘 메뉴 뭐예요?”
“제육볶음이요.”
“어제도 제육 아니었어?”
“어제는 닭갈비였어요.”
구분이 안 간다. 던전처럼.
오후에 20회 더 돌았다. 신화템 1개 나왔다.
“드디어.”
기쁘지 않다. 그냥 데이터 하나 채워졌다.

100회차: 공포
금요일 저녁 7시.
100회 달성했다.
축하할 일이다. QA 업무 완료.
기쁘지 않다.
엑셀 정리한다. 전설템 확률 28.3%. 신화템 0.6%.
기획 의도랑 비슷하다. 밸런스 문제없다.
버그 리스트 15개. 심각도 높은 거 3개.
리포트 작성한다. 2시간 걸렸다.
과장님한테 보고했다.
“수고했어요. 다음 주 신규 던전 또 나와요.”
또.
집에 간다. 지하철 탄다.
핸드폰 켰다. 평소 하던 모바일 게임.
던전 입장 버튼 보인다.
손이 안 움직인다.
게임 껐다.
무엇이 문제인가
토요일 오후.
집에서 쉰다. 친구가 카톡 보냈다.
“야 너 게임회사 다니면서 게임 안 해?”
“요즘 별로.”
“부럽다 게임하면서 돈 버잖아.”
할 말이 없다.
게임을 하긴 한다. 하루 10시간씩.
근데 게임이 아니다.
반복 작업이다. 데이터 수집이다. 버그 찾기다.
재미를 찾는 게 아니라 문제를 찾는다.
개발자들이 만든 즐거움을 내가 숫자로 바꾼다.
확률, 시간, 효율, 밸런스.
게이머가 느낄 재미를 내가 미리 소비한다.
100번 반복해서.
월요일이 온다
일요일 밤.
내일 출근이다.
신규 콘텐츠 또 나온다. 던전 2개 추가.
각각 100회씩 돌아야 한다.
게임 좋아해서 이 일 시작했다.
지금도 게임 좋아한다. 근데 복잡하다.
좋아하는 걸 일로 하면 행복할 줄 알았다.
반은 맞다. 출근이 싫지 않다.
반은 틀리다. 좋아하던 것도 100번 반복하면 달라진다.
이펙트가 안 보인다. BGM이 안 들린다.
숫자만 보인다.
그래도 간다. 월요일 출근.
새 던전 기다린다. 1회차는 언제나 즐겁다.
10회차까지는.
던전 100번 돌면 게임이 엑셀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