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100번 돌았을 때의 공포

던전 100번 돌았을 때의 공포

던전 100번 돌았을 때의 공포

1회차: 오 신선하네

월요일 오전 10시 30분. 새 빌드 받았다.

“이번 업데이트 던전 추가됐어요.”

기획자가 슬랙에 올렸다. 기대된다. 신규 콘텐츠다.

접속했다. 로딩 화면부터 새롭다. BGM 바뀌었네. 던전 입장.

“오 이펙트 예쁜데?”

첫 몹 잡았다. 타격감 좋다. 보스까지 5분. 클리어.

보상 확인. 전설 무기 나왔다. 확률 체크 시작.

“재밌네 이거.”

테스트 노트에 적었다. ‘던전 난이도 적절, 보상 괜찮음, 이펙트 만족’.

1회차는 언제나 즐겁다.

10회차: 패턴 파악

같은 날 오후 3시.

던전 10번 돌았다. 패턴이 보이기 시작한다.

몹 배치 똑같다. 보스 패턴 3개. 회피 타이밍 외웠다.

“전설템 확률 3/10… 30%네.”

엑셀에 정리한다. 회차, 시간, 획득 아이템, 버그 발견 여부.

아직 괜찮다. 일하는 기분이다.

보스 페이즈 2에서 스킬 씹히는 버그 찾았다. 만티스에 올렸다.

“재현율 40% 정도 되는 거 같은데…”

몇 번 더 돌아야 한다. 버그 재현이 중요하다.

QA의 기본이다.

30회차: 자동화 모드

화요일 오전.

어제 20회 더 돌았다. 오늘 또 10회.

이제 눈 감고도 플레이 가능하다.

입장 - 1번 몹 처리 - 2번 몹 처리 - 보스방 - 패턴 1, 2, 3 - 클리어.

4분 50초. 시간까지 똑같다.

점심 먹으면서도 돌렸다. 김밥 씹으면서 보스 잡는다.

“아 죽었네.”

집중 안 하면 죽는다. 그래도 자동으로 손이 움직인다.

확률 데이터 쌓인다. 전설템 28%. 예상 범위 내.

밸런스팀 과장님이 물었다.

“겜큐님, 난이도 어때요?”

“적당한 것 같아요.”

적당한지 모르겠다. 이미 너무 익숙해서.

50회차: 이펙트가 안 보임

수요일 오후 2시.

50회 돌았다. 이펙트가 안 보인다.

처음엔 예뻤던 스킬 연출. 이제 그냥 화면 번쩍임.

보스 등장 컷신 스킵한다. ESC 누르는 손가락이 자동이다.

BGM도 안 들린다. 유튜브 틀어놨다.

“또 노란색이네.”

전설템 색깔. 보라색 먼저 확인한다. 신화템 0개.

확률 0%. 너무 낮은 거 아닌가.

기획자한테 슬랙 보냈다.

“신화템 확률 확인 부탁드려요. 50회 0드랍이에요.”

답장 왔다. “0.5% 맞아요.”

계산해봤다. 50회에서 안 나올 확률 77%. 정상이다.

더 돌아야 한다.

숨 쉬듯이 던전 돈다. 생각 없이 클릭한다.

이게 일이다.

70회차: 게임이 아니다

목요일 오전.

70회 넘었다. 이건 게임이 아니다.

엑셀 작업이다. 데이터 입력이다.

회차, 클리어 시간, 드랍템, 골드량, 경험치.

숫자만 본다. 게임 화면은 배경이다.

옆자리 신입이 물었다.

“선배님, 재밌어요 그 던전?”

“응.”

재미? 모르겠다. 재미를 느낄 정신이 없다.

점심시간. 구내식당 간다.

“오늘 메뉴 뭐예요?”

“제육볶음이요.”

“어제도 제육 아니었어?”

“어제는 닭갈비였어요.”

구분이 안 간다. 던전처럼.

오후에 20회 더 돌았다. 신화템 1개 나왔다.

“드디어.”

기쁘지 않다. 그냥 데이터 하나 채워졌다.

100회차: 공포

금요일 저녁 7시.

100회 달성했다.

축하할 일이다. QA 업무 완료.

기쁘지 않다.

엑셀 정리한다. 전설템 확률 28.3%. 신화템 0.6%.

기획 의도랑 비슷하다. 밸런스 문제없다.

버그 리스트 15개. 심각도 높은 거 3개.

리포트 작성한다. 2시간 걸렸다.

과장님한테 보고했다.

“수고했어요. 다음 주 신규 던전 또 나와요.”

또.

집에 간다. 지하철 탄다.

핸드폰 켰다. 평소 하던 모바일 게임.

던전 입장 버튼 보인다.

손이 안 움직인다.

게임 껐다.

무엇이 문제인가

토요일 오후.

집에서 쉰다. 친구가 카톡 보냈다.

“야 너 게임회사 다니면서 게임 안 해?”

“요즘 별로.”

“부럽다 게임하면서 돈 버잖아.”

할 말이 없다.

게임을 하긴 한다. 하루 10시간씩.

근데 게임이 아니다.

반복 작업이다. 데이터 수집이다. 버그 찾기다.

재미를 찾는 게 아니라 문제를 찾는다.

개발자들이 만든 즐거움을 내가 숫자로 바꾼다.

확률, 시간, 효율, 밸런스.

게이머가 느낄 재미를 내가 미리 소비한다.

100번 반복해서.

월요일이 온다

일요일 밤.

내일 출근이다.

신규 콘텐츠 또 나온다. 던전 2개 추가.

각각 100회씩 돌아야 한다.

게임 좋아해서 이 일 시작했다.

지금도 게임 좋아한다. 근데 복잡하다.

좋아하는 걸 일로 하면 행복할 줄 알았다.

반은 맞다. 출근이 싫지 않다.

반은 틀리다. 좋아하던 것도 100번 반복하면 달라진다.

이펙트가 안 보인다. BGM이 안 들린다.

숫자만 보인다.

그래도 간다. 월요일 출근.

새 던전 기다린다. 1회차는 언제나 즐겁다.

10회차까지는.


던전 100번 돌면 게임이 엑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