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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Dec, 2025
오후 3시, 밸런스 테스트의 지루함
오후 3시, 밸런스 테스트의 지루함 50번째 클리어 오후 3시. 같은 보스 앞에 섰다. 49번 잡았다. 한 번 더. 엑셀 시트에 숫자가 쌓인다. 클리어 시간, 남은 HP, 사용한 포션 개수. 49줄이 채워졌다. 마지막 한 줄이 남았다. "이번엔 3분 12초네." 혼잣말이다. 팀장이 요청했다. "보스 클리어 시간 3분 내외로 맞춰주세요. 너무 빠르거나 느리면 안 돼요." 기획 의도란다. 지금까지 평균 3분 8초. 최단 2분 54초, 최장 3분 26초. 범위 안이다. 문제없다. 근데 50번을 왜 하냐고? 표본 수래. 통계적 의미래. 기획자가 말했다. "최소 50회는 해야 신뢰할 수 있어요." 신뢰. 웃긴다. 나는 이 보스 패턴을 꿈에서도 본다.점심 먹고 졸리다 사실 졸음이 제일 큰 적이다. 점심 먹으면 무조건 온다. 회사 구내식당. 오늘은 제육볶음이었다. 맛있었다. 근데 먹고 나니까 눈이 감긴다. 커피 마셨다. 세 번째다. 오전에 두 잔, 점심 후 한 잔. 그래도 졸리다. 보스가 패턴 1번을 쓴다. 전방 범위 공격. 옆으로 피한다. 자동이다. 몸이 기억한다. 패턴 2번. 돌진. 뒤로 구른다. 역시 자동. 패턴 3번. 전체 광역기. 무적 스킬 쓴다. 타이밍 완벽하다. 정신은 딴 데 가 있다. 손만 움직인다. 이게 3년 차의 경지다. "아." 깜빡 졸았다. 캐릭터가 죽었다. 51번째 시도가 됐다. 엑셀 시트에 'FAIL - 졸음'이라고 적었다. 이것도 데이터다. 기록은 철저히.확률이 안 맞는 것 같은데 52번째 도전. 아니, 51번째 성공이다. 실패는 빼고. 근데 뭔가 이상하다. 레어 아이템 드롭률. 기획서에 '5% 확률로 전설 무기 드롭'이라고 적혀 있다. 51번 잡았다. 드롭 2번. 2/51 = 3.9%. 5%가 아니다. "이거 확률 이상한데." 팀장한테 말했다. "표본 수가 적어서 그래요. 더 해봐요." 더? 몇 번을 더? "100번 정도요." 100번. 웃긴다. 오늘 50번 하는 데 4시간 걸렸다. 100번 하려면 8시간이다. "오늘 못 끝내도 돼요. 내일 이어서 해요." 내일도. 이 보스를. 100번. 마우스를 쥔다. 53번째 시도. 시작 버튼을 누른다. 보스가 등장한다. 같은 대사를 한다. "네놈이 감히!" 52번 들었다. 패턴이 시작된다. 1번, 2번, 3번. 자동이다. 머리는 비어 있다. 손만 움직인다. 화면을 본다. 안 본다. 차이가 없다.3분 10초의 의미 60번째 성공. 드롭 3번. 5%. 아직도 안 맞는다. 팀장한테 또 말했다. "코드 확인해봤어요? 확률표 잘못 들어간 거 아니에요?" 팀장이 개발팀에 물어봤다. 답이 왔다. "확률 맞습니다. 난수 생성기 정상입니다." 정상. 그럼 나만 이상한 건가. "100번까지 채워봐요. 그때도 이상하면 재확인할게요." 결국 나다. 100번 채우는 건 결국 내 몫이다. 시계를 본다. 오후 5시. 퇴근까지 2시간. 40번 남았다. 못 끝낸다. 당연히. "내일 아침에 이어서 할게요." 팀장이 고맙다고 했다. "고생 많아요." 고생. 맞다. 고생이다. 근데 이게 내 일이다. 게임 QA. Quality Assurance. 품질 보증. 품질을 보증하려면 숫자가 필요하다. 데이터가 필요하다. 반복이 필요하다. 재미는 필요 없다. 61번째 시도. 마우스를 잡는다. 시작. "네놈이 감히!" 60번 들었다. 39번 더 들을 것이다. 정신이 어디 갔지 70번째쯤. 정확히는 모른다. 숫자를 세는 것도 귀찮다. 엑셀이 알아서 센다. 나는 그냥 한다. 클릭, 스킬, 회피, 공격. 반복. 보스 HP가 깎인다. 같은 속도로. 3분 5초. 3분 12초. 3분 8초. 다 비슷하다. 기획 의도에 맞다. 근데 재미가 없다. 당연하다. 70번 하면 재미없다. 유저들은 한 번 잡는다. 많아야 세 번. 그들에겐 재미있을 것이다. 나는 70번 잡는다. 나한텐 재미없다. 이게 직업의 차이다. 유저는 게임을 즐긴다. 나는 게임을 확인한다. 즐기는 게 아니다. 검증한다. 측정한다. 기록한다. 재미는 유저 몫이다. 나는 숫자만 보면 된다. 그래도 가끔 생각한다. 나도 예전엔 게임이 재미있었는데. 입사 전엔 RPG 광이었다. 보스 잡는 게 즐거웠다. 지금은? 보스가 그냥 데이터 샘플이다. "크리티컬 발동률 확인 부탁드려요." 오후 6시. 또 요청이 들어왔다. 크리티컬. 치명타. 기본 20% 확률. 이것도 100번 해야 하나? 팀장한테 물었다. "50번만 할게요." "30번만 해도 돼요. 크리티컬은 체감이 중요하니까." 30번. 감사합니다. 80번째 보스. 30번의 크리 확인. 110번. 오늘 못 끝낸다. 내일도 이 보스 퇴근 시간. 7시. 100번 중 82번 채웠다. 18번 남았다. 드롭은 4번. 4.87%. 여전히 5%보다 낮다. 내일 아침에 18번 더. 그럼 100번 완성. 그 다음엔? 크리티컬 30번. 그 다음엔? 또 다른 테스트. 이 보스는 한 달 내내 볼 것 같다. 집에 간다. 지하철에서 핸드폰을 본다. 친구가 메시지를 보냈다. "야, 이 게임 해봤어? 개꿀잼." 링크를 눌렀다. 우리 회사 게임이다. 내가 테스트하는 그 게임. "ㅋㅋ 내가 만드는 거." "헐 대박. 부럽다. 게임하면서 돈 벌잖아." 부럽다. 그래, 부러운 직업이다. 남들이 보기엔. 실제로는? 같은 보스 82번 잡는 직업이다. "ㅇㅇ 재밌게 해라." 답장을 보냈다. 말은 안 했다. 재미없다고. 유저는 재미있어야 한다. 그게 목표다. 내가 재미없어도 된다. 그들이 재미있으면. 이게 QA의 숙명이다. 집에 도착했다. 고시원 문을 연다. 침대에 눕는다. 눈을 감는다. 꿈에 보스가 나온다. "네놈이 감히!" 82번 들었다. 꿈에서도 듣는다. 내일 18번 더 들을 것이다.100번 채우면 끝일 줄 알았다. 팀장이 말했다. "200번으로 늘려주세요." 통계적 신뢰도래.